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11개 회원국 정상이 5월 7일부터 8일까지 필리핀 세부에서 제48차 정상회의를 열고, 중동 정세 악화에 따른 에너지·식량 안보와 해외 이주노동자 보호를 핵심 의제로 다뤘다. 의장국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이 주재한 이번 회의는 미국과 이란의 군사 충돌 장기화로 한때 연기가 검토됐으나, 회원국 협의를 거쳐 규모를 축소한 채 예정대로 개최됐다.
회원국은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싱가포르, 브루나이,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에 더해 지난해 47차 회의에서 정회원 가입이 승인된 동티모르까지 11개국이다. 미얀마는 2021년 군부 쿠데타 이후 이어진 군부 지도부 배제 조치에 따라 외교부 상임차관이 대표로 참석했다. 인도네시아 프라보워 수비안토 대통령, 캄보디아 훈 마넷 총리, 태국 아누틴 찬위라꾼 총리 등 회원국 정상이 자리했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회의 개최 발표 당시 이번 정상회의가 석유·석유제품 공급, 식량 공급과 가격, 그리고 이주노동자 문제 등 3대 현안에 집중한다고 밝힌 바 있다. 정상들은 이러한 흐름을 반영해 「중동 정세의 영향에 대응한 지역 회복력 강화 우선 조치」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성명에는 회원국 간 연대 강화, 조기 경보 시스템 구축, 석유·가스 및 에너지·식량 연계 협정의 효과적 이행과 함께 분쟁 지역에 체류하는 회원국 국민, 특히 이주노동자에 대한 영사 협력 및 지원 강화가 명시됐다. 이주노동자 보호가 ASEAN 차원의 공식 의제로 격상된 셈이다.
이번 회의의 또 다른 성과는 동티모르 정회원 가입을 위한 ASEAN 헌장 개정 의정서 채택이다. 동티모르는 2011년 가입 신청 이후 14년 만인 2025년 10월 제47차 회의에서 정회원 가입이 만장일치로 승인됐고, 이번 의정서 채택으로 법적 절차가 한 단계 진전됐다. 2007년 ASEAN 헌장이 발효된 이후 헌장이 개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해양 협력 분야에서는 5월 8일 「해양 협력에 관한 ASEAN 지도자 선언」이 공식 채택됐다. 선언은 1982년 유엔해양법협약(UNCLOS)을 모든 해양 활동의 법적 틀로 재확인하며, 해양 안보, 수중 인프라 보호, 해양 환경 거버넌스, 불법 어업 방지에 걸친 협력 강화를 약속했다. ASEAN과 중국이 2002년 행동선언(DOC) 이후 협상을 이어 온 남중국해 행동규범(COC)을 의장국 임기 내에 매듭짓겠다는 의지도 함께 천명됐다. 마리아 테레사 라자로 필리핀 외교부 장관은 UNCLOS 준수가 필리핀뿐 아니라 모든 회원국에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미얀마 정세도 비중 있게 다뤄졌다. ASEAN은 2021년 군부 쿠데타 이후 채택한 「5개항 합의(5PC)」 이행 점검을 이어 가는 한편, 군부가 4월 30일 아웅산 수치 전 국가고문을 가택연금으로 전환하고 4월 총선을 통한 민간 정부 출범을 내세우는 화해 제스처를 어떻게 평가할지 검토했다. 회원국 사이에서 군부 정부와의 소통 재개를 시도하는 흐름도 일부 감지됐지만, ASEAN은 4월 총선의 정통성을 아직 인정하지 않은 상태다.
회의 첫날에는 마르코스 대통령 주재로 캄보디아 훈 마넷 총리와 태국 아누틴 찬위라꾼 총리가 3자 회담을 가졌다. 4월 23일 태국이 2001년 캄보디아와 체결한 ‘중첩해역’ 공동관리 협정을 일방 파기하면서 고조된 국경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자리였다. 훈 마넷 총리는 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캄보디아가 긴장 완화와 평화적 대화를 원하며 기존 국경 합의의 전면 이행과 ASEAN 옵서버팀(AOT) 권한 강화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이번 회의 결과는 한국 다문화 사회와도 직접 맞닿아 있다. 국내 체류 외국인의 다수가 ASEAN 출신이며, 결혼이민자와 이주노동자의 출신국 다수가 이번 회의 의제 영향권 안에 있다.
중동 정세 악화에 따른 에너지·식량 가격 충격이 송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 자국민 영사 보호 강화 흐름, 남중국해 안정과 미얀마·캄보디아·태국 정세는 한국 거주 가족과 본국의 일상에 모두 영향을 미친다. ASEAN과 한국은 2024년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CSP)로 격상돼 협력의 무게를 키워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