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한국을 찾은 외국인 환자는 201만 명으로 처음 200만 명을 넘었다. 2009년 통계 작성 이후 최대다. 국내에 사는 이주민의 병원 이용은 사정이 다르다.
통계청의 2024년 이민자체류실태 및 고용조사에 따르면 국내 이주민의 약 6%는 지난 1년 동안 아팠는데도 병원에 가지 못했다. 이들 가운데 38.7%는 그 이유로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꼽았다.
창구는 여럿, 열리는 시간은 평일 낮
제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법무부 외국인종합안내센터(1345)는 한국어를 포함해 20개 언어로 상담하고, 행정기관과 공공기관이 외국인 업무를 볼 때 3자 통역을 지원한다. 다누리콜센터(1577-1366)는 15개 언어로 상담하며 병원과 경찰, 은행, 학교를 잇는 3자 통화를 운영한다.
전국 가족센터에는 통번역지원사가 배치돼 병원과 경찰서, 학교, 행정기관 통역을 돕는다. 서울시는 지난해 5월 '동행 의료통역지원단'을 꾸려 태국어 등 10개 언어로 병원 동행 통역을 시작했다. 경기도의료원 이천병원도 태국어와 베트남어 등 9개 언어 통역을 안내한다.
문제는 시간과 조건이다. 1345는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운영하는데, 오후 6시 이후에는 한국어와 영어, 중국어 상담만 된다. 평일 저녁에는 베트남어나 태국어 상담을 받을 수 없고, 주말 운영은 안내돼 있지 않다.
서울시가 밝힌 의료통역 이용 조건은 진료 3일 전 신청, 평일 오전 9시~오후 6시, 1회 최대 4시간, 한 해 4회다. 경기 여주시가족센터가 이달 시범 운영에 들어간 결혼이민자 출장 통역도 평일 주간, 최대 3시간, 3일 전 신청이 조건이다. 예산이 떨어지면 조기에 끝날 수 있다.
1345의 3자 통역은 주민센터나 출입국 창구에서 말이 통하지 않을 때 담당 공무원이 연결해 쓸 수 있는 서비스다. 이용자가 서비스의 존재를 알고 요청해야 쓰이는 구조다.
1345 상담 통계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외국인을 위한 마을변호사' 안내 메뉴 선택은 모두 4만 9705건이었다. 마을변호사는 법무부가 외국인에게 무료 법률 상담을 연결해 주는 제도다. 베트남어는 5928건으로 베트남 국적 체류자 1000명당 17.6건, 태국어는 341건으로 1000명당 2.0건이었다. 기사 ①에서 확인한 상담원 연결 격차와 같은 흐름이다.
평일 낮에 일하는 이주민에게 평일 낮에만 열리는 통역은 쓰기 어렵다.
태국 출신 A씨는 다문화 관련 기관에서 통번역 일을 했다. A씨는 가족센터에 통번역사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실제로는 잘 이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운영 시간이 정해져 있고 본인도 일이 있다 보니 시간을 맞추기 어렵다는 것이다.
빈자리는 가족이 메운다
공적 통역을 쓰기 어려우면 가족에게 기댄다. A씨는 주변에서 자녀가 있는 집은 아이가 통역을 맡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중학생 정도로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자녀가 부모와 함께 병원이나 관공서에 간다는 것이다. 관공서에서 필요한 일은 주로 비자와 자녀 관련 행정 서류라고 A씨는 전했다.
국내 연구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확인된다. 서울대 간호대학 정예슬·방경숙 연구팀이 지난해 6월 국제학술지 'Children'에 발표한 연구는 결혼이민 가정의 13~18세 청소년 10명을 심층 면접했다. 청소년들은 어머니의 한국어 읽기·쓰기를 돕는 일을 가족으로서 자연스러운 도움으로 받아들였다. 한국인 아버지가 역할을 나눌 때는 부담을 크게 느끼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참여가 적고 자신의 정서·학업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는 심리적 스트레스로 이어졌다. 연구팀은 청소년이 부모 역할을 혼자 떠안지 않도록 지원 체계가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해외에서 나온 한인 이민 가정 연구도 결이 같다. 연세대 이은경 연구자 등 한·미 공동 연구팀이 올해 6월 국제학술지 'Child & Youth Care Forum'에 발표한 연구는 미국 내 한인 이민 가정의 부모와 12~17세 자녀 6쌍을 면접했다. 자녀의 통역은 가족 간 대화를 늘리기도 했지만 일부 가정에서는 스트레스와 갈등을 낳았다.
자녀의 통역은 가족이 서로 돕는 일이기도 하다. 다만 진료 내용이나 체류 서류처럼 전문 지식이 필요한 자리까지 아이에게 맡겨지는 것은 공적 통역이 닿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은 연방 재정 지원을 받는 보건 프로그램에 적용되는 규정(45 CFR 92.201)에서 미성년 자녀에게 통역을 맡기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예외는 긴급 상황에서 자격 있는 통역사를 찾는 동안 임시로 쓰는 경우뿐이다.
의료 통역은 민간이 버티고, 제도는 이제 첫발
의료 전문 통역은 여전히 제도 밖에 있다. 경향신문은 지난 6월 대구의 민간단체 '이주민 건강권 실현을 위한 동행'(동행)의 공공의료통역 교육 현장을 전하며, 외국인 대상 전화 통역 시스템은 있지만 의료 전문 통역은 제도화되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경북일보에 따르면 동행은 2024년부터 올해 5월까지 816건의 의료통역을 맡았다. 첫해 125건에서 이듬해 480건으로 늘었고, 올해는 5월까지 211건이다. 전라남도와 부산 등 일부 지역은 공공 의료통역 체계를 운영하지만 대구·경북에는 공공 재원으로 운영되는 체계가 없다고 신문은 전했다.
경기도는 제도화에 첫발을 뗐다. 국내 장기체류 외국인의 3분의 1이 경기도에 산다. 법무부 통계월보에 따르면 올해 7월 말 경기도의 등록외국인과 거소신고자는 74만 8682명으로 전국의 33.3%다.
'경기도 외국인 공공보건 접근성 향상 및 협력체계 구축 조례'는 지난 6월 24일 경기도의회를 통과했다. 도내에 90일 이상 거주한 건강보험 미적용 외국인 가운데 지원 필요성이 인정되는 사람이 대상이며, 임산부와 영유아, 감염병 의심·확진자는 우선 지원한다. 도는 경기도의료원 산하 공공병원 6곳, 보건소와 연계를 강화하고 협력의료기관을 확보해 의료통역과 상담, 동행 지원 체계를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1345와 다누리콜센터, 가족센터, 지자체 의료통역, 공공병원 통역까지 창구는 적지 않다. 다만 운영 시간과 언어, 대상이 제각각이고 대부분 평일 낮에 몰려 있다. 그 틈을 가족이, 때로는 자녀가 메운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흩어진 창구를 상황별로 묶어 당사자의 언어로 알리는 것이다. 다음은 일하는 이주민이 쓸 수 있는 시간대로 통역을 넓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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