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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3분 미중경제] 미중화해, 왜 한국의 ‘반공’은 저지당했는가?

.......... 무기가 잘 팔려야 돈을 벌어 교회에 헌금도 할 수 있고, 그래야 교회도 은혜로 충만해지는 것이 현실이다(버나드 쇼)...........

 

버나드 쇼의 작품 ‘바아버라 소령’은 구세군의 열혈 신자인 딸과 군수산업가 아버지의 얘기다. 하지만, 무기가 팔리려면 전쟁이 필요하다. 쇼는 현대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파헤치는데 일생을 바친 작가이자 사상가였다. 영국 노동당 창설에도 기여했다.

 

서구 열강은 두 차례 대전을 겪고 나서야 ‘전쟁을 막는 기초는 상호 투자’라는 교훈을 얻었다(제5화). 미중화해는 무엇인가? 투자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중국이 경제를 발전시키는 동시에,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이었다.

 

중국의 오늘은 어떤가? 지난 2020년, 해외투자 유치 분야에서 중국은 처음으로 세계 1위를 차지하며 세계제국 미국을 눌렀다(월스트리트저널). 여기에 미중 투자는 3조 달러를 넘는다. 역사는 계속 새로워질 것이다. 경제발전과 평화, 두 마리 토끼가 바로 이 상호 투자에 들어있다. 남중국해와 대만해협의 군사적 긴장은 부록이다.

 

중국은 어떻게 이처럼 투자 왕국이 되었을까? 미중화해에 즈음하여, 중국은 서방 열강이 상호 투자로 자본주의 업그레이드에 성공하는 것을 목격했다. 열강 상호간에 반복되는 전쟁을 막고, 서로 이익을 추구하며 평화와 번영의 활로를 찾아낸 것을 확인한 것이다(제5화 참조). 중국이 원하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이 투자와 시장경제에 팔을 걷게 된 연유다.

 

그 출발점은 개혁개방과 미중수교이었다(1979). 서방의 상호 투자에 비해 30년 정도 늦은 것이다. 냉전 때문이었다. 냉전 시기에, 서방은 상호 투자로 질주했으나, 중국은 미국과 서방에 봉쇄당했다. 그리고 그들은 한국을 반공 분단 국가로 만들었다. 냉전이 해체되면 반공도 해체될 운명이었다(최근의 종전선언 동향도 같은 맥락이다).

 

왜 미국은 ‘냉전 선언’을 했을까?(‘냉전 해체’를 이해하기 위해서). 2차 대전 후, 갑자기 ‘나홀로 제국’으로 올라선 미국은 두 개의 과제에 직면했다. 하나는 과도한 미국의 군수산업과 무기 재고를 재정비하는 일, 또 하나는 헐벗게 된 서유럽에서 일어나는 사회주의 열풍(Socialist Fever)을 막는 일이었다. 여기에 필요한 경제-군사적 지원으로 미국은 마셜플랜(1947.6)과 나토 창설(1949)을 준비했다. 유럽 냉전 구도는 그대로 중국과 아시아에서도 붕어빵처럼 진행되었다(1947.3).

 

이 무렵, 중국에서도 토지개혁을 앞세운 공산당이 국민당을 누르고 떠오르기 시작했다(1945-49, 국공 내전). 여기서 주목되는 인물이 미국의 조지 마셜 장군이다. 그는 2차 대전의 ‘영웅들의 영웅’으로 칭송받는 군인이다(맥아더, 아이젠하워, 패튼 장군이 그의 휘하였다). 그는 1년여 동안 중국 현지에서 미 대통령 특사로 일하며 중국공산당과 ‘국공 연합’을 조정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귀국했다(1945.12-1947.1).

 

귀국 즉시 중국 철수를 건의하고, 국무장관에 임명되어 ‘마셜 플랜’을 제안했으며, 한국전쟁 당시에는 국방장관으로 재임했다. 미국에서 국무장관과 국방장관을 모두 지낸 인물은 그 밖에 없다. 냉전과 중국철수, 마셜플랜, 그리고 한국전쟁에 조지 마셜처럼 깊이 관여한 인물은 없다. 그에게 노벨평화상은 덤이었다(1953).

 

냉전을 한국에 들여온 것은 미군정이다. 미군정은 일제가 강점했던 한국을 반공 ‘전초기지’로 재정비해 이승만정부에 인계했다. 4.19 혁명 정부를 쿠데타로 뒤엎고 등장한 박정희정부도 이승만정부의 반공과 친미를 계승했다.

 

박정희정부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대규모 월남 파병을 단행했다(총 32만 명). 한미동맹은 절정기를 맞았다(1965). 그러나 그 정점에서 위기기 찾아왔다. 그 신호는 수렁에 빠진 베트남전쟁과, 그에 대한 미국의 반전 여론이었다.

 

미국 시민들은 TV에 비친 베트남전쟁을 보고 놀랐다. 그건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고 실제 현장 보도였다. ‘이게 우리 미군이란 말인가?’ 그들은 자신들이 낸 세금으로 아시아의 약소국 베트남에서 벌이는 미군의 야만적인 학살 장면에 전율했다(한국전쟁 때는 미국 가정에 아직 TV가 없었다). 반전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반전의 대가는 심각했다. 반전을 외치던 인사들이 잇따라 암살당했다. 비폭력 민권운동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마틴 루터 킹 목사와,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떠오르던 로베트 케네디(암살당한 존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가 살해당했다(1968). 분개한 시민들의 반전 시위는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미국 정치권과 군부는 숨을 죽였다. 한미동맹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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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광수

 

현재 (사)미래동아시아연구소를 운영하며 한중관계 연구와 실무에 종사하고 있다. 인천대 동북아국제통상학부 교수를 역임했다.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와 동대학원 경제학과를 거쳐  미국 밴더빌트 대학 박사과정 수학, 베이징대학교 경제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9년 해외경제연구소에서 중국 경제 연구를 시작하여 국제경제연구원, 산업연구원, 외무부 파견, 중국사회과학원 경제연구소 방문학자, 베이징대학교 베이징시장경제 연구소 연구원 등으로 일했다.

 

1991년부터 1996년까지 베이징에 주재하면서 주중한국대사관, 한국무역협회, SK, 한솔제지, 현대건설 등의 현지 고문으로 일했다.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중국 고문(2003~2010), 중국 프로그램 자문(1998~2007), KBS 객원해설위원, 동북아경제학회와 현대중국학회 고문, 비교경제학회 이사 등으로 활동했다.

 

주요 저서로 <미중관계의 변화와 한반도의 미래>, <중화경제권시대와 우리의 대응>, <중국의 잠재력과 우리의 대응>, <현대 중국의 이해>(공저) 등이 있다. 중요 논문으로 <글로벌금융위기 이후 한중 교역협력구조의 변화>, <미중경제협력의 불안정성과 한국경제>, <중국 자본시장 개방의 특성>, <최근 미중 통상관계의 특성>, <중국 정치체제 및 외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