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하원이 결혼 관계에서 부부 간 성관계가 법적 의무가 아님을 명문화하는 민법 개정안을 지난달 초 발의했다. 이 법안은 민법 제215조 ‘공동생활의 의무’ 조항이 성관계 의무를 포함하지 않음을 명확히 하고, 향후 이혼 소송에서도 성관계 거부를 유책 사유로 보지 않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해당 내용은 27일(현지시각) 일간 르몽드 등 주요 외신이 보도하면서 국제적 관심을 끌고 있다.
발의에는 좌파 녹색당과 공산당뿐 아니라 중도·우파 성향의 하원 의원들을 포함해 총 136명의 국회의원이 참여했다. 법안 대표 발의자는 녹색당 소속 마리-샤를로트 가랭(Marie-Charlotte Garin) 의원으로, 그녀는 “민법이 규정한 ‘공동생활’은 결코 ‘동침 의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법문에 명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혼인한다고 성관계 의무가 자동 성립하지 않는다”: 유럽인권재판소 판결
프랑스 내에서 부부 성관계가 법적 의무로 해석된 배경에는 민법 제215조의 문구가 자리했다. 이 조항은 “배우자들은 상호 간 공동생활을 할 의무를 진다”고만 규정할 뿐 성관계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럼에도 일부 판례는 이를 근거로 성관계 거부를 혼인 의무 불이행으로 간주해왔다.
이와 관련해 유럽인권재판소(European Court of Human Rights, ECHR)는 2025년 1월 H.W. v. France 사건에서 프랑스 법원이 부부 간 성관계 거부를 이혼 유책 사유로 본 것은 사생활과 신체적 자율권을 침해한 것으로 인권 침해라고 판결했다. 재판소는 “‘결혼 자체에 대한 동의’가 장래의 성관계에 대한 동의를 자동으로 의미하지 않는다”고 명확히 밝혔다.
ECHR은 판결문에서 혼인 관계에서도 성관계는 개인의 자유이며 진정한 ‘동의(consent)’가 필요하다고 강조함으로써, 성적 자유와 신체 자율성에 대한 국제 인권 기준을 재확인했다.
개정안 핵심 내용과 법적 파급력
발의된 민법 개정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민법 제215조: “공동생활 의무가 성관계 의무를 포함하지 않는다”고 명문화 △민법 제242조(이혼 관련): “성관계의 부재 또는 거부는 이혼의 유책 사유가 될 수 없다”고 명시.
이러한 조문 정비는 향후 가정법(가사 소송) 전반에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그동안 일부 판사는 성관계 거부를 결혼 의무 불이행으로 간주하면서 유책 이혼 판단에 반영해 왔으나, 개정안이 통과되면 이런 판례 관행은 사실상 폐기된다.
법안 발의자들은 교육적 효과도 강조한다. 지난해 프랑스 형법이 ‘강간’ 정의에 비동의 개념(consent)을 도입한 것에 이어, 혼인 관계에서도 동의의 원칙을 명확히 함으로써 부부 내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하고 예방할 수 있다는 취지다.
여론과 사회적 맥락
여론조사 기관 IFOP가 2025년 9월 실시한 설문(프랑스 성인 3,105명 대상) 결과, 여성 응답자의 57%가 배우자와 원치 않는 성관계를 경험했다고 답변했다. 또한 24%는 “강제로 성관계를 가진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남성 응답자의 경우 각각 39%와 14%로 나타났다. 이러한 통계는 결혼 관계에서 성적 동의의 중요성과 현실 간의 괴리를 보여준다.
법제 논쟁과 향후 전망
이번 개정안은 프랑스 사회에 깊은 논쟁을 촉발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성관계 거부에 대한 법적 책임을 제거함으로써 개인 자유를 확대하는 진일보한 조치”라는 평가가 나오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전통적 결혼 제도의 책임 개념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법조계 일부에서는 실제 분쟁 상황에서 개정 조항이 어떻게 적용될지에 대한 법리적 불확실성이 남아 있다고 지적한다.
프랑스 하원은 이 법안을 1월 말 이후 본회의에 상정할 예정이며, 상원 심사를 거쳐 최종 확정될 전망이다. 이번 입법 논의는 단순한 조문 정비를 넘어 혼인 관계에서 성적 자기결정권의 법적 지위를 재정립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